송해 나이 사망 이유 출연료 재산 아들 후임 방송인

송해 프로필

  • 이름: 송해
  • 출생: 1927년 4월 27일
  • 사망: 2022년 6월 8일 (향년 95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삼성아파트 자택
    장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546
  • 고향: 일본령 조선 황해도 재령군 재령면
  • 진행기간: 전국노래자랑 제 5대 (1988.5.8~1994.5.8)
    전국노래자랑 제 7대 진행자 (1994.10.16~2022.5.15)

전국노래자랑 제 7대 진행자로 가장 유명.

 

송해 별세 사망 이유

 2022년 6월 8일 사망
2022.6.8일 오전,  자택에서 아침식사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인근에 사는 딸이 자택으로 찾아갔으며, 이후 자택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송해를 발견해 119에 신고하였다.

소방당국은 오전 8시 19분쯤 유족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나, 송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한다.

병원에서의 공식적인 사망 판정은 오전 8시 45분에 내려졌고 오전 9시 39분부터 사망 소식을 여러 언론들에서 기사화하기 시작했으며, 뉴스에서도 속보로 보도했다.

 이미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던 5월
이미 지난 5월에 서울 아산병원에 내리 입원했고, 마지막 공식 석상이 된 5월 23일 기네스 세계 기록 등재 당시 인터뷰에서 이미 많이 수척해진 상태. 사망 4일 전인 6월 4일 전국노래자랑이 2년 만에 야외 녹화가 재개됐는데, 장거리 이동 등의 이유로 불참했을 정도로 이미 건강이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5월 입원 당시에는 건강에 큰 이상이 없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국민들이 걱정할 것을 우려해 간암을 앓은 허참처럼 숨겼을 가능성이 있다. 2021년부터 포털 실시간 검색어가 폐지되어 1년이 넘었기 때문에 TV나 인터넷 뉴스 속보, 나무위키를 통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이 엄청 많았다.

생전에 "죽을 때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실제 이루어졌다). 비록 정규 회차는 아니지만 그가 녹화에 참여한 마지막 방송이 2022년 5월 15일 충남 당진 편 방송분이며, 그의 사망일과 방송일이 불과 24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끝내 꿈은 이루어지지 못해
그러나 "본인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고 싶다"는 소원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2022년 사망 직전까지도 무대에서 여러 곡의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도 직접 오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송해 출연료

  • 회당 300만 원
  • 한달에 1,200만 원

연봉은 대략 1억 5,000만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각종 행사에도 참여하는 것을 합치면 연봉은 대략 2억 이상으로 추정. 행사비는 대략 시급 300만 원 정도로 2시간에 600만 원 정도였다고 알려져있다.

송해 재산

송해의 절친에 따르면, 계좌에만 약 200억원이 넘는 돈이 있었다고, 그러나 송해는 수백억대 자산가임에도 돈을 쓸데없는 곳에 쓰지 않고 버스 및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검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해 후임

전국노래자랑 후임 MC로는 김신영이 맡게되었다.

 

송해 이야기, 여담

본래는 성악을 전공한 가수였지만,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데뷔하여 코미디언 활동을 더 많이 했기에 사실상의 본업은 코미디언이며, 1988년 61세부터는 MC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송해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들
송해는 생전에 방송사를 넘나들며 확동한 덕분에, 그의 생애에 대해 본인이 직접 출연해 이야기한 방송 자료, 인터뷰 자료가 꽤 많이 누적된 편. 예능 프로그램 중 그의 인생을 돌아본 작품으로는 힐링캠프(2014, SBS), 나를 돌아봐(2015, KBS), 대화의 희열(2018, KBS), 라디오스타(2021, MBC) 등이 있고, 다큐멘터리로는 실향민으로서의 아픔을 언급한 송해야 고향가자(2019, MBN)가 있으며,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송해 1927(2021)이 있고,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2022, KBS)가 있다. 그 외에도 아침마당 출연을 자주 한 편으로, 패널로 출연해서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기사 자료로 전해지는 예가 많다.


송해의 인생 회고는 비교적 일관성 있는 편
일반적으로, 고령자의 기억은 명확치 않거나 옛 시대의 저장매체 부족 때문에 검증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후대 사람이 그들의 생전 기록을 정리할 때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그리고 연예인들은 인터뷰에서 자신을 추켜세우거나 예능적 재미를 주려고 과장을 섞기도 한다. 그러나 송해의 인생에 대한 회고는 비교적 명확하고 일관성 있어서 그런 문제가 적은 편이다. 물론 출생 연도에 대한 부분이나 몇몇 에피소드는 그의 기억의 한계 때문이거나 잘못된 기록을 방치한 때문이거나 기자 등 인터뷰어가 잘못 받아적은 탓에 오류가 몇차례 발견 되었으나, 객관적 자료나 교차검증을 가능케 하는 타인의 인터뷰 등이 많아서 오류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고향은 황해도 재령군
본인이 직접 언급하던 바에 따르면 송해는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재령평야를 나무리벌이라는 좋은 쌀이 나는 옥토로 기억하였다. 실제로 나무리가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는 뜻이라 할 만큼 송해의 어린 시절에는 김소월이 '나무리벌 노래'라는 시에서 언급할 정도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어린 시절, 노래를 좋아하다, 아코디언 연주
어릴 적부터 끼 많은 개구쟁이로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고 전해지며,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윤극영의 《반달》 같은 노래를 어렸을 때 불렀다고 한다. 14살 때부터 공연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했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형, 여동생이 있었는데, 형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며 집을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소상인이기에 이사를 많이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석을 많이 하여 소학교는 남들보다 2~3년 늦게 나왔다고 한다. 소학교를 마치고 재령제2중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로
1949년 황해도 해주음악전문학교에 만 22세 나이로 그의 끼를 눈여겨 보며 예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어머니의 영향 하에 입학해서 성악과에 들어가 성악을 공부하였다. 이는 그가 월남 후 남한에서 전공을 살려 방송인의 삶을 산 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합창단원으로 평양의 모란봉극장 무대에 섰다고 한다. 스스로 이념, 분단을 잘 몰랐던 때로 언급하며, 예술이 좋아 그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질 때까지 누가 누구의 편을 드는지도 파악을 못했다고.

6.25전쟁이 터지게 되다, 가족과의 이별
하지만 학업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자 초기에는 고향(재령)에 머물렀는데, 초기에는 당시 구월산 일대에 활동하던 공산당 유격대의 모병, 국군의 북진 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2~3천여명 규모의 패잔병의 약탈을 피하려고 인근 마을에 숨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950년 12월 인민군과 중공군이 남하하던 때 다시 나가려는데, 당시 어머니에게 "얘야, 이번엔 조심해라."는 말을 들었고, 이에 "걱정 마세요."라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나왔는데,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인사.

조선일보의 6.25 관련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저 대화를 하고 어머니가 준 가래떡이 마지막으로 집에서 먹은 밥이었다고 한다. 또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진주와 포격을 피해 재령에서 남쪽 항구인 해주항으로 피난을 갔다가 보름 정도 걸린 이 길에서 인민군의 포격과 기관총 세례를 피하다 철교에서 떨어져 숨질 뻔했다고 한다.

북한 땅이 되어 버린 해주에서 건너편의 섬인 연평도로 은밀히 나룻배를 타고 도착한 뒤, 연평도에서 LST선에 타면서 부산까지 내려왔다. 이때 실향민으로 배 위에서 “바다야 내 갈 길 어디냐”라는 생각에 지금의 이름, 즉, 바다 해(海) 자를 예명이자 아호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훗날 주민등록 체계가 확립되고 나서 그의 본명이 된다.

군입대와 부인 석옥이 여사를 만난 일
피난선을 타고 도착한 부산항에서 그는 앞 사람만 따라다니다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복무하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메시지를 직접 타전하기도 하였다. 그때 당시 쓰던 모스 부호를 말년에도 기억해내었다. 그리고 당시 군대 선임이 혼자인 그에게 여동생을 소개해 줬는데, 그녀가 바로 그의 부인 석옥이 여사다. 데뷔 이전의 내용이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송해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이므로 국가유공자이며, 그의 사후 장례식장에 국가유공자증이 영정과 함께 진열되면서 대중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군 만기제대 후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서 연예 활동을 시작했으며, 일인다역을 해야 하는 악극단의 특성상 가수 활동 외에 연기도 하고 무대 MC도 보며 활동했다. 라디오 전성시대이던 1960년대엔 박시명과 콤비를 이뤄  '스무고개' 등에서 청취자들의 웃음을 책임졌다. TV 방송이 시작한 후에는 여러 방송사를 넘나들면서 조연급 코미디언으로 활동하였다. 선배 코미디언 박시명이나 후배인 여성 코미디언 이순주와 콤비로 코미디를 했고, 콤비를 하지 않을 때엔 똑똑한 고학력자를 풍자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코미디 활동
배삼룡, 구봉서와 같이 출연한 '그 시절 그 쑈'의 영상, 해당 영상은 2002년에 연기하였다. KBS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듯하다. 다만, 1980년 후에는 MC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여 코미디언으로서의 활약은 뜸해지게 된다.연기하던 코미디 콩트마저도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박시명, 이순주 등이 모두 활동을 중단하거나 고인이 됨에 따라 자연히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가 코미디계에서 왕성히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은 짧게 잡아도 20~30년은 되었고 전국노래자랑 진행이 성공적인 가장 큰 요인은 그의 이러한 코미디 연기 경력이 탄탄한 기반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코미디 연기 당시 가장 잘 하였던 가벼운 딴죽 걸기, 리액션을 하며 판을 깔아 주는 빌드업 역할은 그의 진행 스타일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활용되었다. 그의 진행에서 나오는 익살과 해학은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가수로서의 송해
전국노래자랑 MC로서의 명성이 워낙 높아 다소 조명이 잘 되지 않기는 했으나, 송해의 가수로서의 활동도 대중문화, 특히 중장년층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로로 고평가를 받는다. 송해는 가요무대에 자주 출연하여 과거 악극단 시절의 창법과 발성을 고스란히 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나이가 들며 활동이 미약해진 다른 동료 가수들과는 달리 말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함으로써 그 자체로 인간문화재에 준하는 수준의 과거 문화 전승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80세를 훌쩍 넘기고도 단독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가 하면, 2018년 《딴따라》라는 제목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는 등 나이를 잊은 활약을 하였다.

히트송 커버가 대부분이나 오리지널 곡도
그가 취입한 앨범은 '홍도야 우지마라'와 같은 과거 전통 히트송들을 커버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후에는 본인의 오리지널 곡도 다수 발표하게 되었는데 《나팔꽃 인생》, 《유랑청춘》, 《내 인생 딩동댕》, 《내 고향 갈 때까지》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2022년 사망 직전까지도 무대에서 아무런 흐트러짐 없이 여러 곡의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도 직접 오르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연예계에서 큰 유명세를 얻고 전연령층을 아우르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게 된 시점은 본격적으로 방송 MC로 활동 범위를 넓힌 이후였다.

가로수를 누비며 진행으로 인기
능수능란한 화술과 진행 능력, 그리고 정확한 발음을 가진 그는 1975년 동양방송이 매일 아침 AM 라디오 채널을 통해 방송하던 생활정보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의 진행을 맡으면서 운전자들 사이에서 '송 기사'라는 애칭을 받기도 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이때 운전자들이 교통 통신원을 조직하여 그 제보를 활용한 시스템은 현재도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교통방송에 쓰인다. '가로수를 누비며'는 매주 일요일 라디오 공개홀에서 공개방송을 열기도 했는데 전국노래자랑과 같이 노래 경연을 했고 이는 훗날 전국노래자랑 진행의 밑거름이 되었다.

송해 아들 오토바이 사고

1986년 아들의 오토바이 교통 사망사고 이후 그 충격으로 한동안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면서 3년 후 1989년에 14년 동안 맡아온 진행자 자리에서 완전히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전국노래자랑'으로 한국 방송사에 남을 전설적 활약을 하게 된다.

아들을 보낸 충격을 잊기 위해 참여했던 프로그램?
아들을 먼저 보낸 충격을 잊기 위해서 참여한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1988년 5월 8일부터 2022년 6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MC를 맡은 전국노래자랑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역대 한국 현역 방송인 역사상 가장 장수한 최연장자 기록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전국노래자랑을 34년 동안 진행하여 국내 단일 TV 프로그램 최장수 진행자를 경신, 기록했다. 1994년 5월에 잠시 하차했다가 같은 해 10월 16일에 복귀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국노래자랑 진행 기간을 이 복귀 시점부터 계산하더라도 이미 25년을 훌쩍 넘겼으므로 국내 단일 TV 프로그램 연속 진행 최장수 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다.
앞 문단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송해는 하나 뿐인 아들을 일찍 잃은 슬픔에 방송을 쉬었지만, 당시 전국노래자랑의 연출PD 안인기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 송해와 인연이 있어 그의 진행 능력을 눈여겨보다 직접 그를 찾아가 "송 선생님, 이렇게 쉬고 계실 때가 아니올시다. 우리 바람이나 쐬러 다닙시다."라고 하며 그의 방송 복귀를 적극 설득했다고 한다. 송해가 진행을 맡기 전 MC는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최선규로, 최선규는 당시 전문 MC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돌발 상황이 잦은 현장 녹화에서 매끄러운 리액션이 부족했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도 못해 출연자들이 부르는 곡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던 탓에 적절한 멘트를 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안인기의 설득 끝에 송해는 전국 노래자랑을 통해 방송에 복귀하였고, 가수 출신으로 다져진 가창력으로 때때로 분위기를 띄워주고, 서민적이고 푸근한 이미지와 재치 있는 멘트로 방송의 재미를 살렸으며, 오랜 진행 경력에서 오는 매끄러운 진행 능력은 방송의 콘셉트와 완전하게 맞아들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진행은 오래지 않아 전국민을 매료시켰다. 그때부터 시작된 전국노래자랑과 그의 30년이 넘는 동행은 한국 방송사의 전설 중의 전설로 남게 되었고, 첫 방송 때 이미 환갑을 넘긴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기점으로 비로소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전국노래자랑 역대급 대처
말 그대로 전국노래자랑이다 보니 괴짜 참가자들도 한두 번씩 출연하기 마련인데, 가장 유명한 사례로 2010년에 온 몸에 벌들을 붙이고 나온 양봉업자가 있다. 이때 송해가 보여준 대처 능력은 관록의 극치임과 동시에 대인배 인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방송 직후에 KBS 시청자 게시판은 송해를 찬양하는 글과 저런 사람을 왜 내보냈냐는 글이 반반이었다.

영원한 송해 오빠
특히 나이가 지긋하신 모든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80살이 돼도 90살이 돼도 여전히 "우리 오빠", "송해 오빠"로 불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요일의 남자"이면서, 앨범도 내고 개인 콘서트를 연 적도 있을 만큼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다. 전국 노래자랑에서 초대 가수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는 송해

90세가 넘는 나이게 꾸준한 활동
이러한 꾸준함은 송해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높였다. 젊은 시절 송해는 비슷한 연배의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곽규석 등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년배 다른 스타들이 하나둘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하는 동안 그는 전국노래자랑에서 사람들과 직접 전국 방방곡곡 살을 맞대며 90세를 넘기면서까지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했고 별다른 잡음도 없이 생활한 덕에 이제는 어엿한 국민MC 1인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되었다.

북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고 싶다던 꿈
KBS 대화의 희열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마다 밝히기를, 생애 마지막 전국노래자랑을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이나 학업을 했던 해주시에서 하고 싶다고 하였으며, 이젠 고인이 되었을 자신의 어머니를 초상화로 만나기도 하였다. MBN에서 방영된 특집 프로그램 '송해야 고향가자'에서,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 쪽으로 가기 위해 남북체육교류협회의 남북 응원단으로 합류하면 북한으로 갈 수 있다고 했지만, 방송 당시(2019년) 또 다시 남북관계가 틀어지면서 남북체육교류협회 경기도 9월 말로 연기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창궐로 방북이 더욱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결국 2022년 6월 8일, 한(恨) 많은 세상을 떠나면서 생전에 이루고 싶어 했던 '생애 마지막의 전국노래자랑을 자신 고향에서 하고 싶다'는 뜻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2010년 이후로 건강과 관련된 보도
2010년대 이후부터 그의 건강과 관련되어 보도가 되고 이순재와 함께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라도 하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철렁하는 가슴을 한껏 쓸어내린다는 방송인이었다.

피로 누적으로 인한 녹화 불참, 당시 진행은 작곡가 이호섭
2012년 9월 22일, 전국노래자랑 녹화 촬영 때 돌연 불참을 하였다. 이유는 피로 누적. 그것도 녹화 때 리허설을 하다 피로 누적과 통증 호소 등으로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80대의 최고령인 점 때문에 와병설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건강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85세라는 고령의 나이 때문에 건강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주목받을 일. 해당 녹화 진행은 전국노래자랑의 단골 심사위원인 작곡가 이호섭이 하였다. 그리고 추석 특집 외국인 노래자랑에도 불참하여 허참이 진행하였다. 2012년 11월 18일에도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고, 이호섭이 녹화를 진행하였으나, 다음 주 진행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가수 유지나와 MBC 쇼음악중심 특별출연
2016년 11월 19일 트로트 가수 유지나와 함께 《아버지와 딸》이라는 노래를 발매했고, 발매 당일 MBC 쇼! 음악중심에 특별 무대로 출연하였다. 예상치도 못한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 방송 직후 큰 화제를 모았고,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 바람에 '송해 선생님 무슨 일 터진 줄 알았더니 음중에 친히 나오셨다더라'와 같은 반응도 많았다.

아내를 먼저 보내다.
2018년 1월 20일에 아내를 지병으로 떠나보냈다. 부부가 같이 입원했는데, 아내가 병으로 먼저 가 버린 것이다. 발인식에서 "붙잡으면 무슨 소용 있나. 조금 먼저 갈 따름이야. 열심히 애들 보살필 테니까 마음 놓고"라며 비통한 심경을 전했고, 이에 네티즌들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감기몸살로 인한 입원
2019년 12월 31일 다시 입원했는데, 처음에는 폐렴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감기몸살로 보도되었다. 연합뉴스 보도 때문에 전국노래자랑 측은 2020년 1월 12일 설 특집 녹화는 다른 MC가 대타로 대신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네티즌들은 전국노래자랑의 32년을 맞는 송해의 빠른 쾌차를 바라는 댓글을 올렸다. 이후 무사히 회복하여 퇴원했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전국노래자랑도 타격을 받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방송이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전국노래자랑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2020년 3월 1일 ~ 2020년 6월 28일까지는 스페셜 방송 다시보기 형식으로 대체되었으며, 2020년 7월 5일부터 다시 하는 녹화는 지방 촬영 대신 스튜디오에서 연령별 노래자랑과 특별판으로 대체했다.

유튜브 근황올림픽 출연
2021년 9월 13일, 유튜브 근황올림픽에 출연해 근황을 알렸다. 7kg 정도로 야윈 모습으로 등장하여 영화 송해 1927을 홍보하는 시간을 가졌다.

라이브 콩자반쇼 1부 출연
2021년 10월 21일, 전국노래자랑으로 친분이 깊은 악단장 신재동이 진행하는 라이브 '콩자반쇼'에 출연하여 영화를 홍보하였으며 고령의 나이인지라 1부만 출연하였다.

송해의 일대기 여러분 고맙습니다
2022년 1월 31일에는 KBS 2TV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를 방영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2월 1일에 평소 송해가 본인 다음으로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으면 좋겠다고 밝히던 허참이 간암으로 인해 7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서울 아산 병원 입원과 마지막 클로징 멘트
2022년 5월 14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2022년 5월 15일에 방영한 전국노래자랑(충남 당진시 스페셜로 스튜디오 녹화로 대체)에서 다음과 같은 클로징 멘트를 하였고, 이것이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전국노래자랑에서 한 클로징 멘트가 되었다.

죽을 때까지 하겠다는 약속
생전에 "죽을 때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비록 정규 회차는 아니지만 그가 녹화에 참여한 마지막 방송이 2022년 5월 15일 충남 당진 편 방송분이며, 그의 사망일과 방송일이 불과 24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20년대 초반의 국내외 상황과 그의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송해는 정말로 그가 한 말을 지킨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고 싶다는 소원은 생전 끝내 이루지 못했다.

송해가 생전 가지고 있지 않던 3가지 BMW
생전 자동차, 휴대 전화, 큐 카드(대본 등이 적힌 종이) 이 3가지는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 차는 없지만, 대형/특수차량 면허는 취득했다고 나를 돌아봐에서 밝혔다. 자동차가 없는 대신 'BMW'를 이용한다고 방송에서 밝혔는데 자동차 브랜드가 아닌 BUS, METRO, WALKING을 뜻하며 대중교통 또는 걸어서 이동한다는 의미다. 노년층들 사이에선 아직도 수요가 많다는 피처폰조차도 가지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나를 돌아봐에서 이경규가 자신이 만든 영화 전국노래자랑에 섭외하는데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보는게 더 쉽다는 얘기가 있다.

큐 카드를 쓰지 않는 MC
큐 카드는 교감, 소통을 위해 갖지 않는다고 했으며 몇 년 전의 방송에서 촬영이 있는 곳의 전날에 미리 내려가 그 동네 목욕탕에서 주민들과 함께 목욕하면서 교감을 가진다고 밝혔다. 실제로 큐카드를 고의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큐카드 자체가 정형화된 대본인데 그가 진행한 전국노래자랑에서는 누가 출연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진행을 출연자에 맞게 능동적으로 해야만 한다.  출연자에 맞춰 본인이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출연자에 대한 예우와 존중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고의로 큐카드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도전 1000곡에 류담과 함께 우승
2013년 12월 8일에 방송된 도전 1000곡에 후배 코미디언 류담과 함께 출연해 우승했다.

불후의 명곡 황해도 대표로 출연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2015 3월 19일 방영분에 황해도 대표로 특별출연하였다.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무대를 보여줬다. 부른 곡은 유랑청춘이다. 또한 위에 나오듯 드라마 프로듀사 12화에 특별출연하여 KBS 신입 PD 백승찬이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술을 할 줄 아냐는 모습도 보여줬다.

나를 돌아봐 출연
2015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KBS 나를 돌아봐에 출연했다. 매니저 역할은 조우종. 이 프로그램으로 KBS 연예대상에서 조우종과 함께 베스트 커플상을 받았다.

'해이드'라는 별명을 나를 돌아봐에 출연하여 얻게 되었는데, 부산광역시에서의 에피소드에서 조우종이 그를 낚은 것도 있고 같이 못 자겠다고 하는데 조우종이 계속 같이 자야한다고 하자 결국 폭발해버린 것. 이 에피소드 당시 조우종은 대선배이자 어르신에게 도가 지나쳤다며 대차게 까였다. 나를 돌아봐에서 해이드 말고 얻은 별명은 '해형'이다.

19대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 그래픽
제19대 대통령 선거 KBS 개표방송에 개표 그래픽으로 출연했다. 제목은 전국노래자랑을 패러디한 '전국 득표자랑'이다. 이 그래픽에서 시작할 때 "전국 득표자랑"을 외치며 시작하고 1위 후보자에게 박수를 쳐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8년 7월 23일, 앨범 딴따라를 발매했다.

구전녹용 광고 명예 모델로 발탁
편강한방연구소에서는 '구전녹용'의 광고 명예 모델로 송해를 발탁했다고 한다.
가요무대에 자주 출연하는 편.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고령이라서 현대적 트로트라는 장르가 정착되기 전인 해방 전후에서 1960년대 노래를 그 시절 창법으로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부캐 선발대회, 송해 출전
2020년 엠넷 부캐 선발대회에 '아리송해'로 출전해 등장하는 순간 모든 출연자가 기립하고 공손해지게 하는 힘을 보여줬다. 인순이 역시 참가자였는데 본인이 가장 고참인줄 알았다가 송해의 등장과 함께 양손을 모으고 90도 인사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이상벽을 전국노래자랑 후계자로
전국노래자랑 후계자로 이상벽이 적당하다고 말했는데, 그 때문에 이상벽이 자꾸 "그 자리를 언제 줄거냐?"고 물어보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말해 이상벽이 울상을 지으면서 그럼 제 나이가 90살이 넘어가 버립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상벽도 송해보다 20세 정도 어려서 그렇지 70살을 넘은 상황이다.

송해의 인생 다큐 1927
2021년 11월 18일, 송해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이 개봉하였다.
2022년 설연휴 중이던 2022년 1월 31일, KBS 2TV에서 설 대기획 프로그램인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라는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 송해의 인생을 트로트 뮤지컬로 재구성한 것으로, 가수 정동원, 이찬원, 영탁, 신유 등이 나이별로 송해 역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송해 과거 담배 골초
과거에 골초였다고 한다. 30대 중반까지는 하루도 담배 없이는 못 살 정도로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녔다고 하며, 담배를 무려 3갑 ~ 4갑이나 피웠다고 한다. 그 당시 병원에 찾아갔을 때 의사로부터 폐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듣고도 병원 옆 동산에 올라가 담배를 입에 물었고 그 순간 '이걸 계속 피우면 죽는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

유희열 송해 인연
유희열과도 인연이 있다. 아내 석옥이가 유희열의 고모와 절친한 사이다. 대화의 희열 출연하기 전, 유희열의 고모로부터 '희열의 어머니가 많이 아파서 상심이 클 것이다'라는 말을 해주었고, 이에 방송 중 송해가 유희열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에 유희열도 장난스럽게 송해의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오열하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2013년 3월부터 쓰는 안경이 기존의 타원형 안경에서 남색 테의 둥근 안경으로 한 차례 바뀌었다. 다만 2016년에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출시되었을 때에는 타원형 안경 시절과 남색 둥근테 안경 시절의 얼굴 사진이 병용되었다.

죽는 때까지 지병은 크게 없어
9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병원에 자주 입원하기는 했지만, 죽는 그날까지 딱히 지병을 앓지는 않았으며, 게다가 휠체어는 물론 지팡이조차도 사용하지 않았고, 사망 전날까지도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정정했다고 한다.



송해 추모 특집 생방송 편성
12일에 방송될 전국노래자랑은 송해 추모 특집 생방송으로 편성되었다. 패널로는 현숙, 엄영수, 설운도, 배일호, 박서진이 나왔으며, 방송 말미에는 장윤정도 나왔다. 침울한 분위기였으며 설운도는 너무 슬픈 나머지 송해의 '유랑청춘'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통곡. 차분히 진행하였던 이호섭도 송해와의 추억 회상에 결국 눈물을

 송해 사후 금관문화훈장
송해가 사후 추서받은 금관문화훈장은 문화계 훈장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방송예술인으로는 윤여정 이후 두 번째, 희극인으로는 최초의 수훈 사례가 되었다. 금관문화훈장이 수훈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위대한 근현대 문화예술계의 위인들에게만 허락된 훈장이라는 점에서, 그가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야놀자 AI 딥페이크로 송해 모델, 그러나 5일만에 부고
야놀자에서 AI 딥페이크를 이용해 송해를 모델로 내세운 광고를 게재했으나, 5일 만인 2022년 6월 8일에 부고가 들려오는 바람에 매우 난감하게 됐다. 야놀자는 송해 관련 광고 캠페인 게재를 전면 중단했으며, 유가족과 상의한 후에 광고 진행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 한다. 유튜브 영상은 영원한 국민MC 송해 선생님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타이틀로 바꿔 재업로드하였고, 이후 추모 형식의 광고도 업로드하였다. 원래 광고는 나중에 "건강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전하고자 하셨던 故 송해 선생님의 뜻에 따라 사전 제작됐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반부와 하단에 붙여 다시 게재되었다.

 수익은 코미디언을 위해 기부
2주 동안 송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후 야놀자에 따르면 강호동이 송해가 찍은 광고 컨셉 그대로 이어받아 출연하기로 했다고 한다. 수익은 코미디언들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고.
생전에 표지 모델로 출연한 맥심에서도 공식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당시 표지와 미공개 사진(아래), 미공개 인터뷰를 올리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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